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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문화원의 소극장

 

작년에 장 뤽 고다르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그 소식으로 나는 새삼 오래된 추억을 꺼내게 되었다. 

 

나는 40여 년 전 대학시절에 프랑스문화원에서 장 뤽 고다르의 영화를 처음 보게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당시 같이 영화를 보러 다니던 우리 친구들에게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영화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장 감독을 우리는 '장미꼬다리'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 당시 프랑스문화원은 한국 사람들에게 자국 영화를 소개하는 일환으로 일주일에 두 편 정도씩 계속 영화를 상영했다. 지금이야 넷플릭스다 뭐다 해서 영화 홍수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 당시 우리들에게 프랑스문화원 영화는 그야말로 문화적 갈등을 채워주는 오아시스였다. 그때 봤던 영화로 어슴프레 기억나는 것이 네 멋대로 해라(Breathless,1960)와 비브르사비(Vivre Sa Vie(1962)다. 그 당시 프랑스문화원 영화로 만났던 또 다른 감독이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이다. 

영화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화의 엔딩을 보면서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찾고 있던 우리들에게 그 당시 누벨바그 감독들은 '왜 굳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반문하고 있었다. 그동안 흐른 세월만큼 문화적 사조도 많이 바뀌었다. 

2010년 아카데미 평생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됐을 때, 고다르는 그의 시상식에 불참했다고 한다. 그 불참 이유를 두고 여러 잡음이 일기도 했다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아내를 통해 이 한마디를 표명했을 뿐이다. “쇳조각을 받기 위해 미국까지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또 2007년 유럽영화상 평생공로상을 거절하면서 남긴 말도 그의 성정을 가늠하게 한다. “나 자신이 뭐 그리 큰 공로를 세웠다고!” 


우리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고다르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장 뤽 고다르의 영화사적 의미

 

장 뤽 고다르는 ‘고다르 이전’과 ‘고다르 이후’라는 말이 생겨났을 만큼 고전적 영화스타일과 현대적인 영화스타일의 경계에 서서 스스로 수많은 실험으로 영화적 의미를 확장하는 데 크게 공헌한 감독이다. 고다르는 소르본대학을 중퇴하고 독학으로 영화를 배웠고 친구들인 프랑수아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등과 함께 영화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필자로 활동했다. 

50년대 말 ‘누벨바그’(새로운 물결)라는 사조를 이끄는 감독들로 나선 고다르를 비롯한 이들 세대는 영화 역사상 최초로 영화에 대한 폭넓은 이론적 지식으로 무장하고 영화를 찍은 세대다. 누벨바그 세대 가운데 고다르는 제일 파격적인 영화언어로 첫 작품을 찍었고, 데뷔작인 네 멋대로 해라》(A Bout de Souffle,1959)는 영화언어의 혁명을 몰고 온 영화사의 고전으로 남았다. 

이야기를 펼치는 일반적이고 관습적인 방식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진행되는 줄거리에다 등장인물의 행위를 논리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으며 곧잘 거친 비약과 생략으로 편집을 때우는 네 멋대로 해라의 스타일은 칸트 이후의 의미 탐구에 대한 누벨바그 감독들의 답변이라고 생각한다. 의미를 버려야 비로소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닐까? 

이것이 신선함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60여 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그 신선함을 유지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영화란 무엇인가?

미국식 갱영화를 프랑스식으로 변형시킨 네 멋대로 해라에서 고다르는 그동안 수없이 되풀이된 닳고 닳은 이야기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찍어낸다. 고다르는 내용을 뒷받침하는 스타일이라는 전통적인 수법 대신 스타일 그 자체를 무참히 해제시키고, 관객에게 이것이 바로 영화라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수법을 쓴다. 

 

네 멋대로 해라이래 고다르가 60년대에 줄곧 추구했던 영화 작업은 이야기의 전통적인 경계를 깨는 작업이었다. 영화는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허구를 익숙한 이야기 규칙에 따라 지어낸 거짓말이지만, 관객은 진짜처럼 포장한 그런 허구의 이야기를 즐긴다. 그러나 고다르에게 중요한 것은 영화가 사실적으로 보이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니라 감독이 영화로 무슨 말을 하는지 관객이 자각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낯설게 하기를 통해 새로운 영화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데 영화적 이야기 안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는가,라는 자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화면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고 배우는 화면을 쳐다보며 말하고 때로는 화면 밖에 감독의 논평이 깔리기도 한다. 스타일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이야기의 인공성을 폭로한다는 노선은 브레히트의 거리두기 효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고 60년대 중반으로 가면서 고다르는 미학적 효과보다는 이야기의 정치적 효과 쪽으로 관심을 옮겨갔다.

 

이런 행보는 영화를 너무 어렵게 만들고 있다. 또 고다르 스스로도 자조적으로 말한 것처럼 자신의 행보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표현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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