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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1891년에 도입된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라는 영사기로부터 시작되었다이 장치는 단일 시청자를 위해 설계된 초기 영화 전시 장치였다. 그 후로 1895년에 크게 비추어서 많은 관중이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시네마토그라프(cinématographe), 1896년 바이타그래프(vitagraph)가 개발되면서 영화산업 발전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오귀스트 뤼미에르 - 루이 루미에르 

세계 최초로 영화를 만들어 상영한 사람은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다. 오귀스트 뤼미에르(Auguste Lumière, 1862~1954)와 루이 뤼미에르(Louis Lumière, 1864~1948)가 그들이다.

 

18951228일 파리의 그랑 카페 대로 데 카푸신(Grand Café Boulevard des Capucines)에서 뤼미에르 형제는 "La Sortie de l'Usine Lumière à Lyon"(뤼미에르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을 포함한 일련의 단편 영화를 상영했다. 이 행사는 200여 명의 유료 관객들이 대형 스크린에 투사되는 동영상을 목격하면서 상업 영화의 여명을 알렸다.

 

Lumière 형제의 혁신적인 영화 촬영기는 이 역사적인 순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여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번영하는 영화 산업의 토대를 마련했다. 항간에 최초의 상업 영화로 알려진 기차의 도착은 같은 뤼미에르 형제의 작품이지만 지금은 "La Sortie de l'Usine Lumière à Lyon"가 상영된 그 이듬해인 1896년에 상영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뤼미에르 형제

  사진에 몰두한 집안

뤼미에르 형제의 아버지 앙투안 뤼미에르(Antoine Lumière)의 직업은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였다. 그러다가 그 무렵 출현한 사진으로 일거리가 줄어들자 1861년에 프랑스 중부 지방의 브장송으로 이사하면서 아예 사진사로 직업을 바꾸었다. 

 

1870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프로이센 군대가 프랑스 국경을 넘어 브장송 근방까지 진격해 오는 바람에 뤼미에르 가족은 리옹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거기서 앙투안은 사진 스튜디오를 차렸다. 뤼미에르 형제는 리옹에서 기술학교인 라 마르티니에르(La Martiniere)를 다녔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에 적극적이었던 형제는 사진을 찍고 현상하는 것을 즐겼다. 

당시 사진술은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는데, 뤼미에르 형제의 아버지 앙투안은 감광성이 뛰어난 감광액을 개발해 건판 기법을 개선하는 데 도전했다. 오귀스트와 루이는 대학을 마친 후에 아버지의 연구를 도왔다. 

그들은 대학에서 배운 것들을 도입해 조직적인 실험을 추진했다. 1881년에는 오귀스트가 군대에 입대하는 바람에 루이가 연구를 주도했다. 그들은 감광성이 뛰어난 젤라틴 감광액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고 이어서 ‘블루 레이블(blue label)’로 알려진 사진 건판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뤼미에르 가족은 1882년에 리옹의 몽플레지르에 건판 공장을 차렸다. 점차 사업은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면서 뤼미에르 가족의 건판 공장은 많은 사람들을 고용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시네마토그라프를 발명하다

1890년대 초반에 앙투안은 뤼미에르 형제에게 가장자리에 구멍이 뚫린 말랑말랑한 사진 필름을 보여 주었는데 그것은 딱딱한 사진 건판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 필름은 미국의 조지 이스트먼(George Eastman)이 활동사진 영사기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앙투안은 그 필름을 더욱 저렴하게 만들어 보자고 두 아들에게 제안했다. 

 

당시에 활동사진은 상당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는데 특히 1891년에 에디슨(Thomas Edison)이 윌리엄 딕슨(William Dickson)과 함께 발명한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는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1894년 파리에서는 키네토스코프로 활동사진을 보기 위해 관람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오귀스트는 ‘기계 속에서 행진하는 작은 활동사진들’을 보고 만약 이 사진들을 사람들이 한꺼번에 본다면 얼마나 대단할까 상상하면서 즉시 이 문제에 전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다. 

오귀스트는 석 달 동안 연구를 거듭한 끝에 그럴싸한 구동장치를 만들었고 그 장치에 대한 개선에 몰두했다. 1894년 루이는 어느 날 저녁, 재봉틀을 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그는 ‘시네마토그라프(cinématographe)’라는 기계를 설계했다. 그것은 카메라인 동시에 영사기도 되는 기계로 각 사진이 초당 16장의 속도로 화면에 비치도록 되어 있었다. 결국 1895년 2월 13일에는 뤼미에르 형제는 시네마토그라프에 대한 특허를 등록했다. 영화를 뜻하는 ‘시네마(cinema)’도 시네마토그라프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네마토그라프 (Cinématographe)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는 순간적인 영상을 틈이 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장치였지만, 시네마토그라프는 필름을 연속적으로 영사하여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게 만든 장치였다. 또한 키네토스코프의 경우에는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의 크기여서 야외촬영은 엄두도 낼 수 없었지만 이에 반해 시네마토그라프는 이동이 가능한 크기였고 전기가 없어도 수동으로 작동시킬 수 있어서 야외 촬영도 가능했다. 

 

또 키네토스코프로는 한 사람씩 영상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던 반면, 시네마토그라프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다. 뤼미에르 형제에게 “영화의 아버지”라는 호칭이 부여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중 앞에 나타난 영화

1895년 3월 19일, 뤼미에르 형제는 몽 플레지르 공장 근처에 있는 한 저택에 시네마토그라프를 설치했다. 12시가 되자 공장의 정문이 열리더니 노동자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루이는 시네마토그라프의 손잡이를 돌렸다. 이렇게 해서 세계 최초의 활동사진인 50초짜리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 촬영되었다. 

1895년 6월 11일에는 리옹에서 사진가 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에서 뤼미에르 형제는 10편의 활동사진을 보여 주었다.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이외에도 「정원사 골탕 먹이기」, 「아기 우유 먹이기」, 「바다」 등이 상영되었다. 전문가 집단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뤼미에르 가족은 대중을 상대로 한 행사를 계획했다. 

아버지 앙투안은 파리로 가서 장소를 물색했다. 카퓌신 가의 그랑 카페(Grand Café)에서 세계 최초의 대중적인 영화가 1895년 12월 28일 오후 9시에 상영되었다. 보통 「기차의 도착」으로 알려진 것으로 상영 시간은 3분, 입장료는 1프랑, 관객은 33명이었다. 첫날 입장료 수입은 33프랑에 불과했지만, 그 뒤로 하루 수입이 2,000프랑을 넘어서면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시네마토그라프를 보면서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인류에게 영화를 선사한 선구자들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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