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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 감독을 이야기하려다 보니 50년 가까이 된 삼청동의 추억이 되살아난다.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그 당시 프랑스문화원은 삼청동 초입에 있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이 1970~80년 사이였는데 삼청동 프랑스문화원에는 영화를 좋아하는 대학생들이 늘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문화원 지하에 르느와르 영화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00석이 되려나, 아담한 작은 영화관이었지만 영화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눈을 반짝이던 젊은 영화광들이 이 극장을 가득 채웠다. 대학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타임(TIME)지도 검은 매직으로 칠해져 나오던 그 시절, 문화원 지하 영화관에는 권력의 바로 코밑에서 검열 없는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경이로움이 있었다. 삼청동은 이렇게 우리들에게는 해방구 같은 곳이었다.
여담이지만 그 거리 모퉁이에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이란 독특한 상호가 붙은 찻집이 있었다. 거기서 가끔 전통차나 단팥죽을 먹었던 기억이 나는데... 몇 년 전에 그 길을 지나가다가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이 아직도 그 자리에 박제된 기억처럼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나~. 반가워서 안에 들어가 보니 대학시절 주인아주머니 옆에 가끔 보이던 젊은 처자가 할머니가 되어 반갑게 맞아주었다...
고다르와 브레히트의 소격효과(alienation effect)
《비브르 사 비》(Vivre Sa Vie)는 장 뤽 고다르 감독이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인 소격효과(alienation effect)를 영화에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성과를 거둔 영화로 알려져 있다.
소격효과는 일명 '낯설게 하기'라는 말로 쓰이기도 하는데 관객으로 하여금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사회현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함으로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극적 장치이다. 즉 친숙하고 익숙한 대상에 대해 객관적 거리감을 갖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새로운 의미 관계를 규정하거나 대상을 새로운 원근법 속에 집어넣는 기법이다.(-시사용어사전 발췌)
[비브르 사 비]는 각 장에 몰락 혹은 죽음을 암시하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에 의해 몰락하는 한 여인의 삶을 다루지만, 등장인물의 자연스러운 행동과 대화를 단절시키는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이 등장인물에 동화되는 것을 방해한다. 이와 같은 소격효과(alienation effect)는 관객과 영화 사이의 거리를 형성하며 관객의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관찰을 이끌어내고, 더 나아가 관객 본인의 삶을 자문하도록 유도한다.
《비브르 사 비》(Vivre Sa Vie) 줄거리
레코드샵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주인공 '나나'.
그녀는 고단한 삶 속에서도 세상을 놀라게 할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거리의 여자'가 되기로 한다. 원하던 대로 돈을 벌고 있지만 배우가 되겠다는 꿈은 어느덧 흐릿해진다.
가혹하기만 한 ‘나나’의 삶에 운명처럼 사랑이 찾아오고 그토록 그녀가 바라던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되지만, 곧 그 자유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하고 만다…
배신한 남편 때문에 성매매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친구 이베트의 얘기를 듣고 나나는 '책임'에 대해 말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그러나 이 당연한 말은 영화 속의 여러 장치로 인해 끊임없이 부정된다. 자신의 불행도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하던 나나는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지만 그럴수록 수렁에 빠지듯 잔혹한 현실 속에 가라앉는다. 그녀는 결국 불행한 결말을 맞게 된다.
포주인 라울은 손님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나나를 갱단에 팔아넘기려 한다.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사랑과 꿈을 잃은 '나나'는 끝까지 자신의 행복을 찾지 못하고 결국 차가운 거리 위에 버려지고 만다. 거리 위에 쓰러진 그녀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개인을 비극으로 몰고 가는 사회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함을 강조하는 동시에 본인의 삶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결국 무너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고 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2장으로 구성된 나나의 삶의 단편들은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영화 초반의 대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말...
"말을 할 수록 그 말의 의미가 사라져요"
아마도 이 말은 감독 자신의 의미를 추구하는 작업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을 거 같다.
중국 전국시대 송나라의 철학자 장자(莊子)도 이런 말을 했다. "아는 자는 말할 수 없고, 말하는 자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대화를 할 때 서로 얼굴을 보면서 해야 표정과 몸짓으로 상대방의 의도를 더 잘 파악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한다. 하지만 고다르는 여기에 반대하듯 대화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는다. 또 대화 중에 나오는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화면을 삽입하기도 하며 세상의 모든 것을 낯설게 만들려고 한다.
이번 주말에 《비브르 사 비》(Vivre Sa Vie)를 다시 봐야겠다.